by Ryul Song
There is a specific reason why I wanted to start such a pamphlet magazine. I tried to put it into words but as soon as they were uttered the genuine sense vanished. It was an extremely frustrating experience.
Let me try to explain it with a banal example in architecture. I am drawing two parallel lines at my desk. It is a wall. When I close my eyes I see it more clearly in front of me, what it could be what it could do. At the same time I see in these two lines a lot of effort by many people, endless paperwork, technical and logistical constraints, possible materialities, periods of boredom and periods of sleepless nights, anxiety. I have drawn these 2 lines hundreds of times before. By now I didn’t just ‘construct’ one building but whole cities and ‘erased’ them again in the next moment.
What do you see looking at these two lines? They are just two lines. I would need to draw them just one time and it’s done. Yet every two lines are different, the thought process that manifested them is different. And my two lines are different from your 2 lines, even if they are drawn on the same paper with the same pencil. Even if the result is the same our approach is different, our interpretation is different, our feeling is different. So if we reach the same result can we ignore the process?
Is the result more important or the process? If we see the purpose of our work in the result the process becomes neglect-able. If the quality of our work is judged by comparing results the process becomes neglect-able. Should quality not be defined by the interpretation of the process not of the result? And thereby does not only the process that leads to a result but also the process that fails or appears aimless or useless gain an equal value?
These hundreds of processes are their own hundreds of thoughts that become the essence of our creative actions. I feel a need to create a space to express these hundreds of ideas, thoughts, and experiments, beside the environment that only expresses the observable and the useful, namely the result.
SUPTEXT is not meant to be a magazine in the classical sense. SUPTEXT is an experiment to encourage the exchange of thoughts and ideas among friends. It is not result orientated but process orientated. It is not theoretical but fundamental. It is not practical but essential. It aims to make us understand why we work, how we work, what drives our work, and how the result of our work reflects back again on architecture itself. It aims to question our viewing habits, our manner of speaking, our way of thinking in order to enable us to broaden our understanding of architecture can be.
If you have work on your wall, in your sketchbook, on your computer, drawings, texts, models, photography, film, paintings, work that is equally important to your identity as an architect but discarded by the current state of reflection on architecture around us, please contact me. I would love to give it a platform.
시작 / 과정 / 사고
송률
이 팸플릿 형식의 매거진을 시작하려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이유를 표현하려 했지만, 글로 적어지자마자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왜곡되고 뚜렷하지 않아 계속 좌절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건축에서 진부한 테마 중 하나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려 한다. 나는 작업대에 앉아 두 평행한 선을 그린다. 벽이다. 눈을 감으면 그 벽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공간적으로 어떠한 벽으로써 어떠한 역할을 하여야 하는지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두 선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끝없이 쌓이는 종이더미들, 보기만해도 숨을 못 쉬게 만드는 서류들, 기술적 제약, 수 많은 재료들, 지루한 시간들, 불면의 밤, 두려움들도 보인다. 이 두 선은 내가 그린 수백 번의 선들 중 하나이며, 그러는 동안 나는 하나의 건물뿐 아니라 수백 번 새로운 세상을‘세웠다’가 곧 다시‘지워버린’것이다. 그냥 한번 그리고 말면 되는데… 그저 두 선일 뿐인데…
당신은 그 두 선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나의 두 선은 당신의 두 선과 똑같은 종이 위에 똑같은 연필로 그렸어도 서로 다르다. 서로 시작한 접근방식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며, 그것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다. 그래서 다른 결과물이 도출된다. 그럼 동일한 결과를 도출하였다면 그 프로세스는 무시하여도 되는 것일까?
결과가 중요한 것일까, 프로세스가 더 중요한 것일까? 우리의 작업이 보이는 결과물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프로세스는 등한시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작업이 다른 결과물들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치를 평가 받아야 한다면 프로세스는 무시 될 것이다. 그럼 결과물로 향하여 있는 시도 외에 실패로 보이는 시도, 목적도 없고 불필요해 보이는 시도는 어떠한 가치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가치란 보이는 결과물이 아닌 프로세스에 담긴 복합성의 이해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무수한 시도들은 무수한 생각이며, 그 무수한 생각은 창작활동의 본질이 될 것이다. 그것을 믿기에, 결과물의 보여지는 것과 효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세상 속에서, 그 무수한 생각과 아이디어 그리고 무모한 실험들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 잡지의 서문이 될 것이다.
“SUPTEXT”는 기존 의미로써의 잡지는 아니다. “SUPTEXT”는 친구들간의 생각과 아이디어 교류를 활성 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곳은 결과물로 향하여 있는 곳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향한 곳이다. 이론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곳이며, 목적적이라기보다는 무목적적인 곳이다. 이 곳은 우리가 왜 작업을 하며, 어떻게 작업하며, 무엇이 우리를 계속 작업하게 만드는지, 우리의 작업 결과물이 어떻게 다시 우리의 작업에 영향을 미칠지를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곳이다. 건축을 포함한 모든 창작활동에서 우리의 이해를 확장하기 위한 보는 방식, 말하는 방식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문하는 곳이다.
목적성을 향해가고 있는 지금의 건축적/창작적 환경에서 비유용성이 등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벽에 붙여 놓은 어떠한 것, 스케치북의, 컴퓨터의 드로잉, 텍스트, 모델, 사진, 영상, 그림, 실패한 어떠한 실험과 테스트들 그리고 작업의 작은 단편들은 창작활동을 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들이다.
“SUPTEXT”는 여러분 작업의 플랫폼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업을 보내주시면 컨셉에 맞추어 편집하여 발행하겠습니다.
Design / Building / Time
by Ryul Song
The beginning everyday use of a building after its completion is the point of contact between the architectural/spatial concept and the experience of this concept. Architectural design is not design for sake of design but interpretation of reality to enable life in our reality. Architecture should not be refined, frozen in a shape or form. Its final meaning lies within the adaption to reality and its transformation into a new reality.
The great humanist in modern architecture Josef Frank once famously said: “The living space is never unfinished and never finished; it lives with those who live within.” He establishes with this sentence almost a concept of anti-design, design not as a finished product but an open system that has no defined beginning and end. It is important to build a good building from the very start but it is evenly important to incorporate the passing of time within it. Of course a building will run down eventually but the base has to be laid that it ages well. The aging of a building is synonymous with the accumulation of memories and experiences; it physically records a person, an activity, the passing of time itself. I wish for an architecture that contains a philosophy of time; defiant against aging and proud to age at the same time.
In this context Mi Jung Lim and Seung Teak Lee of stpmj confront us with a radical idea. Most notably known for their wooden Shear House in Yecheon and the exposed-concrete Stratum House in Icheon which are based in simplicity of form and detail, clarity of structure, and the intriguing use of material, they produced a series of what they call post-construction drawings, analyzing the aging of their buildings.
After the completion of a building usually the aging through adaption to usage, which doesn’t necessarily affect the physicality of the executed design, happens without the involvement of the architect. However by documenting the actual physical change of a building in drawing on a detail level the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design (as separate from the actual reality of existence of a building) is extended beyond the completion of a design. The building itself is not a result of design anymore but becomes part of the now ongoing design process. The relation between design and the actual building starts to blur, shifting the definition of design as a process in relation to the building rather than a means to its end. In stpmj’s post-construction drawings the design process and the executed building become one on a metalevel; they cannot be understood or seen separately. Even with the aging of the building the design process is still involved, never unfinished and never finished.
Design / Building / Time
송률
건축물의 사용이 시작되는 시점은 공간의 건축적 개념과 그 개념이 소모되기 시작하는 접점이 될 것이다. 즉 건축이, 또는 건축물이 단순히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며, 건축적 개념의 시작과 동시에 현실을 재현하며 소모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은 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형태의 가독성을 넘어, 그 자체의 궁극성은 현실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근대건축의 거장 휴머니스트 요셉 프랑크는 말한다: “거주공간은 결코 미완성적으로 남지 않으며, 또한 결코 완성적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 곳은 그 곳에 사는 인간과 함께 살아간다.” 그는 이 문장으로 반(反)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였다. 디자인은 완성된 제품/결과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디자인이란 열려있는 시스템으로써 그 시작과 끝이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훌륭한 건축물을 지어간다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 건축물이 흘러가는 시간 안으로 녹아 들어 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건축물이 낡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좀 더 잘 나이 들어 갈 수 있는 토대는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한 건축물의 낡음이란 그 곳에서의 기억의 축적이며, 그 기억을 소유한 개인, 행위 또는 시간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낡음에 대항하여 무작정 버티려고 고집하지 않는, 시간의 철학을 담는 건축이면 좋겠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stpmj의 임미정과 이승택은 우리에게 파격적인 관념을 보여준다. 형태와 디테일의 단순화, 구조의 명확성 그리고 흥미로운 재료의 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예천군에 설계한 목구조/탄화목 마감의 Shear House, 이천시에 설계한 콘크리트를 노출시킨 Stratum House는그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건축물의 나이 들어감을 통찰하는 post-construction drawings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건축물이 완공된 후, 시행된 디자인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이용 방식의 적용에 의해 발생하는 일반적인 나이 들어감은 건축가의 관여 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건축물의 물리적 변화를 상세도 수준의 드로잉으로 기록하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건축물 존재의 현실성과 상대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프로세스 그 이상의 의미로 확장시킨다. 건축물 그 자체는 더 이상 디자인 결과물이 아니며 여전히 계속되는 디자인 프로세스의 일부이다. 디자인과 실재 건축물간의 관계는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디자인은 그것의 끝을 구현하려 하기 보다는, 지속되는 프로세스로 나아간다.
stpmj의 post-construction drawings에서 디자인 프로세스와 시행된 건축물은 이론적으로 하나가 되어간다. 이제 이 둘은 서로 구분되어 이해 될 수 없으며, 건축물의 나이듬과 함께하는 디자인 프로세스가 여전히 전개되고 있다: 결코 미완성적으로 남지 않으며, 또한 결코 완성적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Fragments of Uselessness
The Leftover Room
by Ryul Song
█ During the renovation of House RS in Seoul a leftover room emerged █ accidentally, circumstantially. █ Suddenly it was just there, with a door, a window, a hole in the floor. █ We told the client they could use it as a storage room, trying to justify its existence. During the construction period it became my hide-away place, 30 minutes of not arguing with the head of the construction company, █ 30 minutes of solitude, sitting by the window, dangling the feet through the hole. █ 하우스 RS의 증개축 공사 중 자투리 방이 생기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 기존 건축물의 예측 불가성이 만들어 낸 예측 불가한 공간. █ 문 하나, 창문 하나, 방바닥 중간쯤의 구멍 하나. █ 우리는 의뢰인에게 이 방은 창고 용도 등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방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애쓴다. 그러나 이 방은 공사 기간 중 나의 비밀장소가 되어간다. 시공사와의 언쟁을 피해 30분 정도 나는 그 곳에 머무르는 일이 더욱 자주 생긴다. █ 30분간의 고독, 창문 곁에 앉아, 뚫린 방바닥의 구멍에 다리를 걸쳐 내려 천천히 흔들거리며. █ Visiting the client a couple of months after finishing the project the small room was still empty, visiting after 2 years the small room was still empty █ with only a cushion on the floor next to the window. It had become the hide-away place of the mother, a reading corner, a soul space. █ The hole, intended to bring some light into an otherwise dark staircase, turned out to be a very efficient natural air ventilation utilizing the chimney effect, sucking cold air from the basement through the small door into the living room; they didn’t have to used their air-condition in 2 summers. █ 공사가 끝나고 몇 개월 후 이 집을 방문했을 때, 그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2년이 지나 방문했을 때도 그 방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 창문 곁 방바닥의 쿠션 하나를 제외하고. 그 방은 엄마의 비밀장소가 되었다. 책을 읽기도 하는, 영혼의 공간. █ 아래쪽의 어두운 계단실에 빛을 들이기 위하여 뚫었던 구멍은, 굴뚝효과를 발휘하여 매우 효과적인 자연 공기순환 장치로 작동한다. 지하로부터 빨아들인 차가운 공기를 이 작은 방을 거쳐 거실까지 내보낸다. 집주인은 그 사이 두 번의 여름 동안 에어컨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 It reminded me of a quote by Hans Hollein, even if he didn’t intend its meaning in this context: █ “Form does not follow function. A building is itself. Architecture is without purpose. What we build will find its usefulness.” █ The useless, the accident, the unintentional, the nothingness, █ is a large part of what turns architecture into a place. It brings a concept into the reality of the every-day; █ it surpasses the limits of the thinkable, the planable. █ As architects we have to dare to allow the useless, to allow our design process to enable accidents, to allow space to happen without control or intent, █ fragments of uselessness. █ 한스 홀라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가 반드시 위와 같은 문맥의 의미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 “형태는 기능을 따르지 않는다. 지어진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건축은 목적을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가 짓는 것들은 그것 스스로 유용함을 찾는다.” █ 무용無用, 우발, 의도되지 않음, 무無, █ 이 모두는 건축이 장소가 되도록 하는 유의미한 것이며, 일상적 현실의 확장 개념을 불러오며, █ 생각할 수 있는, 계획할 수 있는 모든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 건축가로서 우리는 무용無用의 것을 만들어 낼 엄두를 내어야 한다. 우리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우발성을 허락하여야 하며, 통제와 의도 없이 생겨나는 공간을 허락하여야 한다. █ 무용無用의 파편. █